좀 깁니다.
"어서 오세요♡"
그때 그렇게 대답하는 게 아니었다.
"네, 3500원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태연자약할 수가 있지?
"아, 저..저기... 사진 한번만 찍어도 되나요?"
절대 싫어,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나의 (속으로 외치는) 피맺힌 절규는 그저
자비심 없는 한 여중생의 셔터 불빛에 삼켜질 뿐이었다.
나중에 이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어버릴거야.
유서는 이렇게 남겨야지.
<미워! 저주할테다! 선배 이 빵꾸똥꾸야!!>
사건은 대략 사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처럼 동인 행사에 참가하기로 한 선배와 나는 어떻게 하면
물건을 좀 더 잘 팔아먹을 수 있을까 하는 주제로 토의를 하는 중이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우리 같은 영세 소규모 동아리가,
그것도 창작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건 힘들다."
"으음, 그렇죠..."
"무슨 수를 쓰든 일단 시선을 사로잡아야 해.
그래야 최소한 우리 책을 들여다 보기라도 할 테니까."
"예에, 지극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그럼 그걸 어떻게?"
"네가 좀 맡아 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하?"
"너 말고는 아무도 못 하는 일이야."
나밖에 할 수 없는 일.
만날 예라이 이런 쓸모없는 놈 등의 폭언이나 일삼는 선배가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내게 뭔가를 '부탁'한 적은
동아리에 들어오고 나서 지금껏 딱 한 번도 없었다.
(대개 '명령'이었지. 빵셔틀이라든가...)
"해 줄거지?"
평소 모습이랑은 도저히 매치가 안 되는 사근사근한 목소리.
그 위화감이 위기감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난 그만
선배의 페이스에 보기 좋게 말려들고 말았다.
그야말로 상큼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하겠습니다!"
그 후 행사 당일날까지
선배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면서...
이때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때도 그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다가올 재난을 알아채고 회피할 수 있는 두번째 기회마저 날려먹었다.
그리고 약 세 시간 전.
"으랏차, 준비는 되었느뇨? 오늘 하루 완전히 작살내버리자!"
"저기요, 그러니까 이번에 제가 할 일은...?"
"아아, 그거?"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나의 후두부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심대한 충격이 가해졌고
내 정신줄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말았다.
눈을 뜬 곳은 근처 역내의 여자 화장실.
당시의 내 몰골은 위에서 보신 대로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 개의 그림자들...
"꺄악~ 너무 귀여워!"
"그러게, 어디서 이런 애를 주워왔대? 재주도 좋아."
이...이 어둠의 요기가 물씬 풍기는 분들은 누구신가요?
"음, 인터넷 동호회로 알게 된 지인. 의상이랑 메이크업을 부탁했는데
이렇게까지 기합 팍 넣고 나서줄 줄은 몰랐지. 고마워요, 마이 시스터즈~"
"아하하~뭘~ 덕분에 좋은 구경 했지 뭐야? 쿡쿡쿡"
뭐요? 이보쇼, 이보쇼!
"그러니까, 내가 해야 될 일이라는 게..."
"아나, 이런 구제불능 띨띨이. 굳이 설명을 해야 하니?
넌 지금부터 우리 부스 홍보의 영광스런 사명을 지게 된 거란다.
아님 내가 하리? 여자가 여자 옷 입으면 뭐가 신기해 보이겠냐?
뇌가 있는 인간이라면 이쯤에서 알아서 눈치 까고 일할 준비를 해야지 않겠니?
그래도 잘 어울려서 다행이구만, 쪼매난 멸치 루저 체형도 나름 쓸 데가 있다니까? 푸큭."
그래, 이 독설의 폭풍. 이게 진짜 선배죠.
에잉, 못난 놈.
잉여면 잉여답게 그냥 잉여거리고 있을 것이지.
그렇게나 선배로부터의 인정이 절실했단 말이냐?
왜 그런 걸까, 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왜, 왜......
내 눈은 다시 서서히 초점을 잃어 갔다.
"근데 어떡하지? 너무 잘 꾸며 놔서 남자로 안 보여."
"사실 너무 추상적인 과제라고요.
'이쁘긴 하지만 사실 얜 남자예요'를 어필한다는 게..."
"메이크업을 다시 해야 할까?"
"아니, 전부 고치기보단..."
"어쩌구..."
"저쩌구..."
"블라블라블라..."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야 임마, 좀 웃어! 손님들 다 쫓아 보낼 일 있냐?!"
그리고 지금 이 상태다.
죄송합니다, 선배. 딴 건 다 해도 그건 도저히 못 하겠네요.
지금은 간신히 포커페이스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겁습니다.
것보다 선배, 꽤나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그런 발랄한 미소 처음 봅니다.
평소엔 절대 안 보여주시잖아요.
확실히 희소가치는 있지만,
이런 식으로 보고 싶지는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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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좋아. 솔직히 반신반의했지만,
이렇게까지 효과가 클 줄은 몰랐는걸.
나중에 뒷풀이로 뭔가 맛있는 거라도 사 줘야 할까.
고마워, 정말로.
그러니까 표정 좀 풀어.
계속 그러고 있으니까 어쩐지 내가 심한 짓 한 것 같...
아, 심한 짓 한 거 맞구나.
그, 그래도 걱정 마!
혹시나 네가 이걸로 장가 못 가게라도 되면 내가 책임져줄 테니까.
내 여동생 되서 같이 살자.
..농담이고.
으~응. 어쩌지.
어떻게 달래줘야 하지....
원하시는 분들 계시면 이어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