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re] 처방 감사드립니다
Nick Dr. Gothick
Time 2007-12-31 10: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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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전뇌 (shnain)님께서 남기신 글입니다. >고딕선생님의 진단을 듣고 감동받은 저는 밖으로 뛰쳐나가 아무나 붙잡고 좋아하니 사귀자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거리 횡단보도쪽에서 신호 기다리는 사람들을 상대로 꼬셔보았습니다. 다섯살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참 귀엽더군요. 그래서 사귀자고 했습니다. 물론 거절하더군요. 하지만 제까짓게 저의 매력을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조금 튕기다 넘어오겠지 하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사귀자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파출소 앞이더군요. 아, 옆에서 누가 자꾸 뭐라고 하던데 그게 그 애 엄마였나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말을 들은척도 안 하니 파출소 앞으로 절 유인한 것 같습니다. 나쁜년. 그래서 좀 파출소에 잡혀있었더니 제 엄마가 와서 절 데려갔습니다. 제가 아직 13살이 아니라 처벌은 받지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더 나이 먹기 전에 대마도 펴보고 싶습니다. -> 5살 정도의 아이에게는 사귀자고 말하면 안 됩니다. 결혼하자고 해야 먹힙니다. >그 다음날은 여자라면 외모에 상관 없이 꼬셔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빨리 넘어오더군요. 그녀를 54번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비록 수줍어서 말은 안 했지만 그녀도 절 좋아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외모는 상식 이하의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전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하루는 그녀와 함께 보냈습니다. 처음엔 별 마음이 없었지만 시간이 갈 수록, 그녀를 보면 볼 수록,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었을 때는 54번을 위해서라면 저의 피와 살도 발라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사람의 외모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완벽히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저와 54번은 저만의 비밀장소에서 계속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살게 되면 가족의 반발이 심할테니까요. 학교에 갈 때는 도망가지 못하게 작은 방에 그녀를 가두어 놓고 갔습니다. 그런데 처음엔 그렇게 행복해보이던 그녀가 날이 갈수록 힘이 빠져보이는 것입니다. 사료나 음식찌꺼기도 줘 봤지만 그녀가 뭔가를 먹는 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날마다 쇠약해져가는 그녀를 위해 케이크도 훔쳐다 주었습니다. 아, 물론 빵집 가게 주인한테 바로 잡혔지만 그 때는 이미 한 입 가득 케이크를 물고 있었습니다. 경찰서에 갔다가 돌아오는데까지 꽤 시간이 걸리길래 제가 먹고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오직 그녀만을 위해 참았습니다. 침에 젖어 반쯤 소화된 케이크를 그녀에게 주었지만 역시 관심이 없더군요. -> 사랑을 하게 되면 원래 음식을 거부합니다. 저도 그럴 때는 M6*20 커넥팅 너트를 볶아 주곤 했습니다. 이게 안 통하면 중국산으로 바꿔서 한번 더 주면 됩니다. >고민을 하던 저는 마침내 저의 피를 그녀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저의 사랑과 생명의 덩어리를 먹지 못한다면 무엇을 먹겠습니까. 그녀의 날개를 잡아 제 팔 위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름없이 관심 없어보이는 그녀를 보고 실망하여 모든 희망을 포기하려는 찰나, 저는 그녀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얼마간 지켜보았더니 이윽고 그녀의 뾰족하고 아름다운 입을 저의 팔에 꽂아넣고 힘껏 피를 들이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희열에 찬 저의 뇌리에 나타난 시를 이곳에 올립니다. -> 그러시면 안됩니다. >"닳아빠진 천둥곰팡이는 손때뭍은 키보드에 달라붙은 가스솜사탕 >배부른 누에는 어제도 불타는 유리바늘을 구부렸다 >심심한 발견은 소스라친 도로의 앙증맞은 니켈 동전과 바람궁전 막대기 >푸른 액자는 사모하는 교과서에게 교염을 토한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지난번의 처방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저와 54번과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았던 미소는 함께 보낸 시간만큼 우리들에게 낯설지 않기에 가슴은 작은 자를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행복을 향해 기어가십시오. 다음 열차는 지옥행. 지옥행. 본 역의 마지막 열차입니다.